출판사 소개
신간 '심슨 월드' 제작에 참여한 윌북의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터 등이 19일 서울 마포구 윌북 출판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지연 인턴기자
지난 15년간 전 세계 '심슨 덕후'들에게 궁극의 소장품으로 불려온 책 '심슨 월드'가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 등장했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원작자 맷 그레이닝이 시즌 20까지 모든 회차의 제작 정보와 줄거리, 이스터에그를 집대성해 2010년 펴낸, 무게 4㎏짜리 영문 가이드북이려니 했다.
그런데 표지를 넘겨보니, 어라,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쓰여 있다! 번역서라면 우리말 구조상 분량이 늘어나면서 내용 배치가 달라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 한국어판은 판형은 물론 1,200쪽 어디를 펼쳐봐도 삽화와 텍스트의 위치·비율까지 원서와 소름 돋게 똑같이 편집돼 있다.
책을 낸 윌북의 최혜리 편집장에게 이렇게까지 공들인 이유를 물었더니 "저작권사의 기준이 워낙 높아서"라는 '웃픈' 답이 돌아왔다. 작업 기간 2년에 역자만 7명. 자사 20여 년 역사상 가장 유쾌한 책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윌북 제작·홍보진을 19일 만나 우여곡절로 가득했던 제작기를 들었다.
'심슨 월드'와 노란색 별책부록·맷 그레이닝 지음·최세희 성문영 신소희 이민희 이양준 진영인 최민우 옮김·윌북 발행·1,200쪽·17만 원. 박지연 인턴기자
윌북이 '심슨 월드' 출간을 처음 시도한 건 2016년. 이미 다수 흥행작을 낸 출판사로 자리매김한 시기였음에도 그레이닝이 세운 봉고 코믹스는 "심슨은 타국어 번역이 불가한 콘텐츠"라며 완강하게 나왔다. 윌북은 번역 샘플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검수에 대한 입장차로 이내 결렬됐다.
그러다 3년 전, 사내의 심슨 팬들이 의기투합해 '재도전'을 건의했다. 심슨 속 날카로운 풍자를 사랑하는 박효주 팀장도 욕심이 생겼다. "결국 가족 이야기잖아요. 크고 작은 부족함을 가진 구성원들이 옥신각신하다가도 화합하는 서사가 한국 사회에도 울림을 줄 거라 생각했어요."
봉고 코믹스에 테스트 원고를 보내 놓고 기다리기를 몇 개월, 마침내 긍정적 회신이 왔다. 상상치 못한 계약 조건과 함께였다. "번역이 심슨 특유의 유머를 전달하지 못할 경우 저작권사 단독 재량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거였다. 원서의 형태를 조금도 바꿔선 안 된다고도 했다.
출판계에서 잔뼈가 굵은 최세희 번역가도, 애니메이션에선 한 소절 불리는 게 전부인 노래의 역사적 배경까지 설명하는 책의 밀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해선 환갑 때도 끝내지 못하겠다"며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번역가 여섯을 더 불러 모아 한 테이블에 앉았다.
'심슨 월드' 본문 중 일부. 윌북 제공
'말맛'을 살릴 방법을 두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논의가 1년 넘게 계속됐다. 호머 심슨의 명대사 "D'oh!"를 '도우' '또우' '뜨아' '뜨어' 중 무엇으로 할지와 같은 문제의 연속이었다. 애니메이션 자막을 참고하는 방안도 언급됐지만, 자막은 자수 제한이 엄격해 축약된 부분이 많다는 게 한계였다.
게다가 미국의 온갖 하류 문화와 근대 철학 개념까지 건드리는 '심슨 가족'의 블랙 유머는 활자만 옮긴다고 전해지는 게 아니었다. 결국 3명의 편집자와 4명의 디자이너 등이 포함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미국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을 꼼꼼히 설명한 부록을 별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고생 끝에 단행본 10권 분량의 번역이 완성됐다. 번역팀 일원이었던 이민희 번역가는 기억에 남는 사례를 묻자 "크러버플 선생님이 바트에게 'D'투성이 성적표를 건네며 'Have a D-lightful summer'라고 핀잔한 장면을 'D지게 즐거운 여름 보내렴'으로 고친 게 생각난다"고 답했다.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의 윌북 부스를 찾은 많은 시민들이 신간 '심슨 월드'를 구경하고 있다. 윤기훈 인턴기자
번역이란 큰 산을 넘었지만 책을 찍어내는 과정이 남았다. 봉고 코믹스가 기대하는 완성도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전국 방방곡곡 여러 인쇄소 문을 두드리다가 수작업에 가까운 정교한 실크인쇄가 가능한 곳을 찾아냈다. 가름끈도 앞서 나온 독일어판과 달리 2개를 넣었다.
마케팅도 만만치 않았다. 저작권사가 사은품 판매에 난색을 표하면서 책만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과제가 생긴 거다. 영문판 중고가가 50만 원을 호가한다 해도, 국내에 그만한 수요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김준영 마케터는 더 많은 독자에게 책을 소개하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결심했다.
결과는 초대박. 첫 준비 물량이 30분 만에 완판되고, 목표 금액의 8,396%(4억1,983만 원)를 달성했다. 사은품 없이 오로지 책만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로는 전례 없는 성과였다. 한국어판 '심슨 월드'를 받아본 봉고 코믹스도 이렇게 극찬할 수밖에 없었다. "환상적이네요(They look fantastic)!"
다음달 초 일반 판매를 앞두고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를 묻자 박효주 팀장이 답했다. "시즌 12의 '똑똑해진 호머'요. 호머가 뇌에 박혀 있던 크레용을 제거하고 똑똑해지는데, 스스로 다시 멍청해지기를 택하거든요. 지능 숭배가 팽배한 지금, 대책 없는 낙천성이 마음에 들더라고요."